야마모토 교시(山本恭司) 일본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 영혼의 탈식민지화와 미래공창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근원적 생명력=근원적 에너지이다. 그리고 그 생명력의 작동을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靈)과 혼(魂)의 차이는 무엇인가? 영은 혼보다 우주적·근원적 생명에너지와 더욱 밀접하게 상관연동(相關連動)한다. 영은 개체생명(個體生命)과 우주생명(宇宙生命)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다. 혼은 개체생명에 내재되는 생명력이다. 영도 혼도 ‘식민지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왕왕 자기와 타자의 영혼을 식민지화·영토화하려는 충동에 빠진다. 그러나 그 시도는 파탄하게 된다. 그 사람은 거꾸로 자기 안으로 영혼을 봉쇄하고 만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며 영혼의 식민지화의 부메랑 효과이다.

자승자박하는 근원적 주체(원인)는 악(=선의 결여)이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사탄(마귀)이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으로 이름을 붙이고, 유교에서는 불인(不仁)으로 규정한다. 그 악은 뭇사람의 생명 그 자체에 숨어 있어, 기(機: 인연)에 따라 현현(顯現)한다.

식민지화된 영혼은 탈식민지화(脫植民地化)되어야 한다. 그 계기를 가져오는 주체는 무엇인가? 자유로운 영혼이다. 자유로운 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식민지화된 영혼은 다른 자유로운 영혼과의 접촉·촉발·계발에 의해 자기를 혁신해야 비로소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자유로운 영혼은 어떠한 성질(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 첫 번째 조건으로 ‘용기’를 들고자 한다. 용기의 사례를 살펴보자.

인간은 번뇌를 떠나서 살 수 없다. 그 인간이 한편으로 신이나 부처를 동경(憧憬)한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자기모순이다. 그렇다면 자기모순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은 영원토록 구원받지 못한 것일까? 신이나 부처에게 기피되고, 또는 운명적으로 신이나 부처와의 사이에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단절이 주어진 실존인 것일까? 아담과 이브의 자손인 인간은 신의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영원한 죄인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결코 절망적 실존에 운명 지어진 존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실제로 궁극적 행복(공복 共福)을 찾아서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기피하고 인간을 처벌하는 신도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나 부처도 따지고 보면 ‘인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축복받은 존재이다. 예를 들면 “인간을 저주하는 신”이라는 생각은 쇠약한 혼이 만들어낸 망념일 뿐이다.

인간을 떠나서 신도 부처도 없다. 인간이 바로 신이며 부처이며 하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을 맞아들여 모시고 모시며 끝까지 모실 때, 인간의 근원적 생명력이 각성한다. 이것이 바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의 ‘시천기화(侍天氣化,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이 명명.)’의 작동이다. 나는 동학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의 사상과 실천에도 용기 있는 영혼을 본다. 용기의 밑바탕에는 예지(叡智)가 작용하고 있다. 인간의 예지가 번뇌를 보리(菩提; 근원적 생명력)로 전환시킨다. 그 확신은 인간에게 희망을 가져다준다. 희망은 용기 있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포상인 것이다.

근원적으로 용기 있게 산 근대인은 일본에도 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지원노예’를 자부하고, 케노시스(kenosis: 자기무화 自己無化)를 몸소 실천한 아라이 오오수이(新井奧邃)이다. 진정한 용기로써 기도하고 전쟁(러일전쟁)을 부인한 오오수이는 자기 삶을 ‘신전(神戰)’이라고 일컬었다.

최시형이나 아라이 오오수이의 사상 철학은 동양적 인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거기에는 미래 개신(開新)에 대한 낙관적인 확신이 있다. 거기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생각의 하나가 ‘미래공창(未來共創)’이다. 근대 한국과 일본의 정신 풍토가 그들 위인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양국이 눈뜬 민중이 미래공창의 ‘전사(戰士)’로서 활명연대(活命連帶)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0월 26일에 교토대학(京都大學)에서 열린 다산학(茶山學) 국제학술회의(주제 ‘다산에서 본 생명과 영성의 문제’)의 기조강연을 맡은 김 주간은 다산 영성의 진수를 ‘외천활윤(畏天活倫)하는 영성의 인문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회의 마지막에 ‘접화군생(接化群生)’하는 영성을 ‘한’ 사상적 영성의 시원으로 제시했다. 그렇다면 접화군생이란 어떤 역능(力能)을 말할 것인가?

그것을 비유하자면 초목이 마른 쓸쓸한 겨울 들판에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와 봄비에 촉발되어서 들풀이 싹트고, 이윽고 땅이 제비꽃, 민들레, 자운영 등이 꽃피는 생명의 대지로 일변한다. 그리고 부근의 산들은 햇빛을 받아 온통 푸른 새싹으로 뒤덮인다.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천연을 애완하면서 남녀간, 세대 간의 차이를 대립의 원인으로가 아니라 동경의 인연으로 삼고 차별 없이 공복(共福)을 누린다. 이와 같은 공락세계(共樂世界)가 연쇄적으로 지구상에 출현한다.

접화군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식민지화된 영혼이 자유로운 영혼과 만나(접), 바깥에서 자극을 받고 자승자박으로부터 해방된다(화). 이 영혼의 자유화가 동아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적으로 터지고 근원적 생명력이 넘치는 혼돈을 거쳐서 이윽고 지구상은 공락의 영향(榮鄕: 이상향, 낙원-옮긴이)으로 일시에 변한다.

김 주간은 ‘공공철학(公共哲學)’을 제창했다.(도쿄대학 출판회 출간 ‘공공철학’ 총20권 외) 이들 서적은 이성, 감성, 의지의 철학으로 일본의 학계(學界)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김 주간이 스스로 밝혔듯이 그것은 ‘심학(心學) 패러다임’이었으며 ‘영성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기 전의 방편적인 철학이었다. 그것은 그 후 김 주간이 ‘하다’라는 동사를 붙여서 ‘공공하는 철학’이라 일컫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공공하는 철학’은 지금 ‘활명개신(活命開新)하는 영성의 인문학’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전환을 촉진하는 것이 미래공창네트워크이다. 미래공창네트워크는 종이 매체와 인터넷 공간 서로가 공창 주체가 되고 세계로 펼쳐진다. 우선은 일본과 한국부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올해 8월에 한국에서 연속적으로 개최된 세 개의 국제회의(모두 동양일보사 부설 동양포럼 주최 또는 후원)에 참가했다. 8월 3일부터 5일까지 3일간, 충북 음성에 있는 가톨릭계의 꽃동네영성원에서 개최된 회의(주제 ‘공공하는 영성을 새밝힘한다’)에서는 프란시스코 교황에게 신뢰받는 오웅진 신부가 운영하는 ‘꽃동네’를 찾았다. 나는 여기서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표방하는 가톨릭 영성에 괄목했다. 가톨릭 신앙의 신수(神髓)가 ‘창세기’의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라는 영언(靈言)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실천되고 있는 것 같았다.

8월 10일부터 12일까지의 3일 동안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개최된 학술회의에서는 조선유학을 대표하는 이퇴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김 주간은 “종래의 퇴계학은 죽은 퇴계를 해부하고 퇴계의 영혼을 죽여 온 것이 아닌가?”라고 문제제기하면서 회의의 주제를 ‘외천활리(畏天活理)하는 영성의 인문학’으로 잡았다. 퇴계의 몸은 없어지더라도 그 영혼은 하늘을 외경하고 이치에 근원적 생명력을 부여한 퇴계로서 이 21 세기에 살고 있다. 미래공창의 동지로─.

과거에 살았던 사람의 실적을 해부하고 인식하는 것은 근대 이후의 과학적 학문 방식이어서 그것을 가지고서는 과거 인식에 머물고 만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의 영혼을 지금 여기에, 미래에 향해 되살려서야만 희망으로 이어진다. ‘과거’와 ‘현재’라는 지나간 시간의 축 안에서 사고가 식민지화되어 있는 한 그 학문은 미래공창의 의의를 가질 수 없다.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충북 청주에서 개최된 5회 동양포럼의 주제는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이었다. 부제는 ‘조명희(趙明熙)·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루쉰(魯迅)의 비교 조명’이다.

근대의 구미 열강과 제국 일본에 의한 동아시아 식민지화는 인민의 토지와 재산과 생명을 무자비하게 빼앗아갔다. 반인도적인 포학(暴虐)함을 뒷받침한 것이 종교적 도그마이고 선민의식이고 인종차별 이데올로기이며 국가주의 등등이었던 것이다.

근대 과학은 종교 신앙의 이야기적 근거가 되는 신화를 반이성·비합리라고 하여 부정했지만, 바로 그 ‘과학’이 새로운 신이 되어 버렸다. 영혼이라는 우리 실존의 근거를 불가지(不可知), 미신으로 물리쳤다. 즉 미신화한 과학 신앙이 영혼을 포위하고 과학적 이성이라는 영토 안에 가두어 버린 셈이다. 21세기 인류의 시급한 과제는 그 영혼을 탈식민지화·탈영토화 시키는 것이다.

백 년 전에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가 나타났다. 나쓰메 소세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소세키의 작품은 백년 후의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중국의 루쉰은 그 소세키를 본받아 필검(筆劍)을 휘둘렀다. 한국에서는 영혼의 자유를 살고 지향한 철인(哲人)·시인이 몇 명 나타났다. 시인 윤동주(尹東柱; 일본에서 옥사), 혁명 소련에서 죽은 시인·작가인 조명희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고, 기독교인의 장일순(張壹淳)도 그 한 사람이다.

조명희의 ‘낙동강’은 제국 일본에 영토와 인간의 존엄이 짓밟혀도 자유로운 영혼을 잃지 않았던 주인공 박성운으로 하여금 “당신은 또 당신 자신에 대하여서도 반항하여야 되오.” 라고 말하게 했다. 그것은 고대 이래 영혼이 식민지화되었음을 깨닫지 못했던 인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기도 하다. 조명희의 작품은 미래공창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중국의 루쉰은 중국인 친구의 설득에 따라 ‘적막(寂寞)함’(현실도피)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펜을 잡았다. “창문 하나도 없는 철의 방”에 바람구멍을 뚫린다고 하는 ‘희망’ 때문에 궐기(蹶起)하고 중국의 잠든 영혼을 심하게 흔들었다. 그것은 곧 미래공창의 뜻이고 지금은 미국과 견줄만한 기세를 보이는 대중국의 탄생에 기여한 인물이다.

한국 사람들의 영혼을 식민지화할 수 있다고 망상한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皇國臣民)’, ‘일시동인(一視同仁)’ 등등의 궤변을 가지고 한국인에게 상처를 주었다.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는 일본적 영성을 대지적(大地的) 영성으로 규정했지만 그 대지를 일본인에게 빼앗긴 한국의 백성들은 하늘과 이어지는 영성에 눈을 떴다.

1980년대 한국 민주화의 바탕에는 영성에 대한 각성에서 발단(發端)하는 미래 지향이 있었다. 작년 이래의 정치적 혼돈도 개신에의 진통이다. 한국 사회는 혼돈 속에 희망이 있다.

김 주간이 ‘접화군생’을 제창한 날부터 거슬러 올라가 10일 전, 지난 10월 16일에 홋카이도의 로이톤 삿포로(호텔)에서 열린 주 삿포로 대한민국 총영사관 주최의 특별 강연에서 ‘나쓰메 소세키와 조명희’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활명연대(活命連帶)’를 제창했다.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철학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이다. 어린 시절 김 주간은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서 유교적 영성을 배웠고, 아버지에서 일본식 실용주의를 배웠으며, 어머니에서는 기독교적 영성을 전수받았다. 사상적 입장이 서로 다른 세 사람 사이에는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태창 소년이 어린 마음으로 바란 것은 “어떻게 하면 세 사람이 마음을 너그럽게 하고 모두가 나를 보고 웃어 줄까?”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이에서 일어서는 생명’이라는 김태창 철학의 원형은 유년기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공공하는 철학에서 이야기해온 ‘맺고·잇고·살리는’ 것이나 ‘사이’, ‘간발(間發)’도 대립·상위한 상호간의 매개와 융화를 요구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당시 세계에서 최첨단을 달리던 영국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함으로써 일본을 타자의 눈으로 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서양 근대가 안고 있는 과제도 보게 되었으며, 그 사이에서 자기가 설 자리를 찾아서 고뇌했다. 소세키가 제자에게 이야기한 ‘즉천거사(則天去私)’라는 말은 백년 후의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소세키의 신경지(新境地)이었다.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의 일본은 없고 미래개신을 향하는 소세키 만년의 경지가 열려 있다고 생각된다. 소세키는 자유로운 영혼에 의한 미래공창의 역사를 시작하는 것을 백년 후의 동아시아에게 의탁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조명희는 일본의 토요대학(東洋大學)에서 배우면서 지기를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고, 일본·독일·이탈리아의 삼국동맹(三國同盟)으로 뭉쳤으므로 독일로 가는 꿈도 단념하고 인간 평등을 정치 차원에서 실현시켰다고 믿은 소련에 가서 한국인에 대한 교육에 미래공창의 꿈을 걸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스탈린한테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이고 총살을 당했다.

일본과 한국은 그 사이에 바다를 낀 열도와 반도로 유라시아대륙 북동 구석에 위치한다. 나쓰메 소세키와 조명희와 루쉰이 꿈꾼 것은 역사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아시아의 민중들이 함께 번영하는 미래개신이었다고 김 주간은 보고 있다. 그 견해에 나도 찬성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공창’이라는 우리 영혼을 이끌어가는 데에 가장 적절인 지표가 필요하다. 미래공창을 추진하는 것은 도시의 ‘시민’일까? 아니, 그보다도 공복사회(共福社會) 실현의 신념을 관철시키는 뜻이 있는 민중 ‘지민(志民)’, 생각하고 철학하는 ‘철인(哲人)’의 활명연대(活命連帶)라고 김 주간은 생각한다.

강연회가 시작되기 전 회의장에 흐르는 노래가 최성봉이 부르는 ‘넬라판타지아’였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김 주간의 근원적 생명력의 원천인 것이다.

지난 11월 3일에 교토대학에서 개최된 동아시아 유교를 둘러싼 한·중·일·미 국제회의에서 김태창 씨는 주최자(일본) 측을 대표해서 기조강연을 했다. 그리고 해부에 폐색하는 종래의 유교를 ‘공공하는 철학’의 기본이념인 ‘대화(對話)·공동(共?)·개신(開新)’의 관점으로부터 다시 받아들이고 ‘미래공창(미래개신) 하는 영성의 인문학’으로 재구축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1년(2017년) 동안 나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나라 민중을 영성 차원에서 잇는 미래공창네트워크가 퍼지기 시작한 것을 실감했다. 일본인과 한국의 철민(哲民) 사이에서 일어서는 영성 대화가 더욱 전진되기를 기원한다.

 

야규 마코토(柳生眞)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 영성 새밝힘과 영혼의 탈식민지화

 

필자는 이번 2017년의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열린 여러 국제회의와 강연에 참석했다. 8월에는 3~7일에 ‘공공하는 영성을 새밝힘 한다-꽃동네 영성에게 배우다-’(동양포럼 한중일 회의 Ⅲ 꽃동네대학교·동양포럼운영위원회 공동주최·장소 충북 음성군 꽃동네영성원), 10~12일에 ‘외천활리(畏天活理)의 인문학(人文學)’(영남퇴계학연구원·도산서원선비문화원 공동 주최, 장소 경북 안동 도선서원선비문화원), 13~15일에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와 미래공창-조명희(趙明熙)·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루쉰(魯迅)의 비교조명-’(한·중·일 회의 Ⅴ 동양포럼 주최, 장소 청주대학교)이 개최됐다.

또 10월에는 일본의 홋카이도 삿포로(札幌)에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특별강연 ‘나츠메 소세키와 조명희-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두 작가를 통해 한·일 관계를 다시 생각하다-’(주삿포로 한국총영사관 주최·장소 로이톤 삿포로)가 열렸다.

이들 국제회의 및 강연의 주제와 장소는 다양했으나 그것들을 일관하는 세 가지 기둥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영성(靈性)’이고, 두 번째가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이고, 세 번째가 ‘활명연대(活命連帶)’이다. 여기서 거론되고 논의된 내용을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세 가지 키워드로 묶어서 말하고자 한다.

먼저 ‘영성(靈性)’인데 사전을 찾아보면 ‘신령한 품성·성질’이라는 의미가 나오고, 또 일반적으로는 초자연·신비주의·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쉽다. 하지만 이번에 논의된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니라 ‘안’과 ‘밖’, 또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 사이를 소통시키는 작용이자 역동을 말한 것이다.

꽃동네 회의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적 영성(꽃동네, 마더 테레사, 아라이 오오수이(新井奧邃), 예수의 치유 등) 이외에도 유교적 영성(‘중용中庸’, 명재 윤증 등), 일본적 영성(안도 쇼에키(安藤昌益),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등), 러시아적 영성(소로비요프 등), 아프리카적 영성(우분투)과 같은 세계 각국, 여러 사상가의 다양한 ‘영성’이 소개되고 논의되었다.

또 일본의 동일본대지진 후에 보고된, 생과 사의 중간 영역을 매개하는 ‘택시를 타는 유령’, 제1의 생명(개체생명), 제2의 생명(우주적 생명)에 대한 나와 타자 사이에 일어나는 제3의 생명, 미래공창의 원동력으로써의 영성 등 현대적인 영성에 대해서도 논의되었다.

그리고 그 논의를 통해 한국적 영성, ‘한’적 영성의 특색, 특징도 드러났다. 예를 들면 풍류도(風流道)의 ‘접화군생(接化群生)’적 영성은 무교(巫敎)를 바탕으로 하면서 유(儒)·불(佛)·도(道)를 포괄하고 초월하고 소통하는 것이었다. 근대 한국의 독특한 기독교 사상가인 유영모(柳永模)는 거기에 기독교를 아우르고 하나님을 ‘없이 계심’으로 규정하면서 유·불·도·기(基)의 동서회통을 모색했다.

또 19세기에 기학(氣學)을 제창한 최한기(崔漢綺)는 ‘신기(神氣)’를 핵심개념으로 삼았다. 이것은 우주에 빈틈없이 충만하고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것이다. 그 신기가 엉켜서 사람도 사물도 형질(形質)이 생기고, 사물의 형질 속에 신기가 스며들어 일하면서 그 사물이 성장·운동·변화하고(기가 사물에 스며든다는 주장은 다른 ‘기氣’ 사상가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기가 흩어지면 생물이 죽고 사물은 붕괴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신기를 일종의 영성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실은 이러한 사생관·우주관은 동학(東學)과도 공통된다. 다만 동학에는 ‘다시 개벽’ ‘후천개벽(後天開闢)’이라는 독특한 역사관이 있고, 또 동학의 절대자는 비인격적인 ‘지기(至氣)’라는 측면과 더불어 인격적인 ‘천주(天主)’ ‘상제(上帝)’라는 측면이 있고, 사람(예를 들면 수운 최제우)에게 말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퇴계 이황(退溪李滉)은 ‘이발(理發)’, ‘이동(理動)’, ‘활리(活理)’ 등 리(理)에 능동성(발發·동動·도到·활活 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중국유학사에도 거의 유례가 없는 것으로 중국대륙·대만 등 중국어권 연구자들도 많이 주목하고 있다. 그것은 리가 법규·규정·질서와 같은 고정적인 것이라기보다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르게 하도록 촉구하는 영적인 것-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안 좋은 생각을 했을 때 항상 “안 돼!”라고 말린 다이몬(귀신)과 같은-과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포럼에서 교토대학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교수는 주자학의 ‘리’가 리α(초월적·절대적·보편적·전체적인 리), 리β(개별적·상대적이고 개개의 사물에 내재되는 리)와 더불어 리x(메타 리: 리α, 리β를 성립시키고 리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지평·형식으로써의 리)라는 3층 구조가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 리를 인식·실천하는 행위자로써 ‘주체α’(전체적인 리α를 인식하고 당연히 개별적인 리β도 인식할 수 있는 주체), ‘주체β’ (리β 밖에 인식할 수 없는 주체)와 더불어 ‘리x’를 파악할 수 있는 ‘주체x’(리를 창출하고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주체성’)이 있다는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여기서 앞에서 본 퇴계가 강조한 리의 능동성과 관련시켜서 생각해보면 주자학보다 오히려 동학이 떠오른다. 실은 동학 교조인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의 아버지인 근암공(近庵公) 최옥은 이름 높은 퇴계학자였다. 그리고 1860년 음력 4월 5일 최제우는 몸살을 앓고 병상에 눕다가 한울님(上帝)이라 칭하는 목소리를 듣고 ‘내 마음은 곧 너의 마음’(吾心卽如心)이라 고하고, 선천시대의 종언과 후천개벽(혹은 다시 개벽)의 도래를 알리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것은 바로 ‘리x’로서의 한울님이 인간에게 능동적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최제우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곧 그가 주체x가 되었음을 뜻한다. 동학이 강조하는 ‘시천주(侍天主)’는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의미와 더불어 인간은 누구나 시대와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을 주체x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동학사상에서 왜 사실상의 폐정개혁 요구인 교조신면운동이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는지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이다. 한국의 조명희(趙明熙)와 일본의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그리고 중국의 루쉰(魯迅)이라는 한중일의 대표적 작가를 주제로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논의했다. 모임 장소에는 엔니오 모리코네 작곡, 키아라 페르라우 작사로 최성봉이 부르는 ‘넬라 판다지아’, 존 레논의 ‘이매진’, 고바야시 사치코(小林幸子)의 ‘꿈의 끝(夢の涯て)’이 흘렀다. 이들은 모두 영혼의 자유를 갈구하는 내용의 노래들이다.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의 ‘탈식민지화’는 청주대 포럼에도 참석한 오사카대학(大阪大學) 후카오 요코(深尾葉子) 준교수(准敎授)가 제창한 ‘타마시이(魂)의 탈식민지화’에 유래한다. 하지만 김태창 주간에 의하면 일본어의 ‘타마시이(魂)’가 주로 개체에 깃든 생명력·정신·생명에너지를 의미하는데 대해 ‘영혼(靈魂)’은 우주적·근원적인 생명력·생명에너지를 가리키는 ‘영(靈)’과 개체의 생명력·생명에너지를 가리키는 ‘혼(魂)’을 합친 말이다.

‘얼’과 ‘넋’이라는 한국 고유어가 한자어의 ‘영’과 ‘혼’과 각각 대응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영’과 ‘혼’은 둘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둘로 서로 나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김태창 주간은 현대 양자역학이 밝힌 빛의 성질-파동(波動)과 입자(粒子)의 성질을 함께 지니다-에 비유해 보면 ‘영’은 파동이고 ‘혼’은 입자와 같다고도 지적했다.

한편 ‘탈영토화’는 김 주간에 의하면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의 deterritorialisation(탈영토화)에 유래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영혼의 ‘탈식민지화’와 ‘탈영토화’라는 낯선 말을 쓰고 단지 ‘해방(解放)’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은 전자가 타자에 의해 자기 영혼의 “뚜껑을 덮어진” 것에 대한 자각이 있는 것이 ‘식민지화’인데 대해 그것이 없는 것이 ‘영토화’로 구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는 각 참가자가 나름대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회의를 통해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가 딱 한 번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속에서 끊임없이 ‘식민지화·영토화’와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반복해야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참가자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 같다.

조명희와 나츠메 소세키와 루쉰은 각각 문학을 통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시도했다. 조명희의 경우는 실제로 조국 땅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근대의 식민지화·영토화는 군사적·정치적 지배뿐만 아니라 피지배자에게 ‘내발적(內發的)’이고 ‘주체적’인 복종을-나아가서는 지배자에의 동화를-요구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현대철학에서 말하는 소위 ‘생권력’을 구사했다. 하나의 예로써 총독부의 ‘식민지사관’에서는 조선시대 양반 지배층들은 주자학의 번쇄한 해석을 둘러싼 이론투쟁만을 일삼고 사회는 정체하고 민중들은 그러한 지배층의 착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일본제국은 그러한 도탄에 빠진 조선 민중들을 구제하고 근대문명의 은혜를 주었다는 줄거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시키려 했다. 일본의 식민지 권력은 조선왕조를 전근대적인 ‘죽이는 권력’으로 규정해 놓고 스스로는 ‘살리는 권력’임을 과시한 셈이다.

하지만 그 실태를 보면 식민지권력은 조선 사람을 일본제국에 충실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보다 일본화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누고 후자에게는 온갖 장면에서 차별대우했고, 독립운동에 관여 또는 그 혐의를 받은 자는 더욱 가혹한 처벌을 가했다.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보면 체포·투옥 후 병보석(病保釋)된 지 몇 달부터 몇 년 후에 죽은 사람이 많은 것에 놀라게 되는데, 조명희의 대표작인 ‘낙동강’에서는 주인공 박성운의 죽음을 통해 그러한 식민지 생권력의 참혹한 뒷면을 들추어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백정의 딸인 히로인 로사를 통해 식민지화·영토화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그려내기도 했다.

청주 포럼에서는 김선우 화가가 조명희의 정신세계·작품세계를 그린 ‘아무르 강의 생명수(生命樹)’가 회의장에 전시되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뿌리내려야 할 땅을 잃은 채 허공에 떠 있고 그것을 두 마리의 용이 지키고 있다. 용들은 투명하고 뒤의 캄캄한 허공이 그대로 비치고 있다. 용이 투명한 것은 그것이 생명에너지의 상징으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땅을 잃은 나무 꼭대기는 빛으로 가득 찬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다. 이것은 영혼이 땅을 잃어도 하늘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조명희의 ‘땅 속으로’에서 주인공은 조선 사람 그리고 스스로를 가리켜 “우주생명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로구나!”라고 외쳤다. 그러나 사실은 우주생명이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외침을 통해 우주생명과 자기와의 연계를 재확인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이 근대화·부국강병으로 분주하던 시기에 작가로 활동한 나츠메 소세키는 제국대학(帝國大學, 후의 도쿄제국대학, 도쿄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에 국비유학생으로 런던에 유학했으나, 당시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이었던 대영제국의 중심지에서 서양 근대의 실상을 목도하고, 일본인으로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의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신경쇠약으로 일본으로 소환(召還)되었다. 귀국 후에는 도쿄제국대학과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學校)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지만, 친구의 권고로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호평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모든 교직을 버리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기자로서 소설가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도쿄외국어대학(東京外國語大學) 시바타 쇼지(柴田勝二) 교수는 소세키 소설의 주인공들이 제국 일본의 우의(寓意)라고 지적했다. 소세키의 참뜻은 그 문학적 우의를 통해 서구 열강을 흉내 내어 제국화(帝國化)하는 일본에 대한 경종(警鐘)을 울리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메이지 일본의 근대화는 원래 서구 열강의 침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무리를 해서 서양근대 제국주의에 동화·의태(擬態)·모방한 외발적(外發的)인 근대화였지 역사적 필연에 의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성과가 점차 나타나게 되고 특히 청일·러일전쟁에 승리한 후로는, 원래 일본의 근대화가 외발적·타율적으로 구미 열강을 모방한 것임을 깜빡 잊고서, 마치 일본인이 본래 잘난 것처럼 착각하고 오만에 빠지게 되었다.

소세키는 소설·강연·수필 등을 통해 그 망각(혹은 억압)과 오만을 비판하고, 또 그것이 장차 일본 스스로를 망치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타국을 식민지화·영토화하기 전에 먼저 일본인 스스로를 서양근대에 식민지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바타 교수는 소세키가 시즈오카현(靜岡縣) 이즈(伊豆)의 슈젠지(修善寺)에서 크게 토혈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이른바 ‘슈젠지의 대환(大患)’이 한일합방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고, 의식을 되찾은 그가 곁에서 지키던 사람들에게 한일합방의 경과에 대해 물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소세키는 영국 유학을 통해 제국주의가 피지배민을 불행하기 만드는 것은 물론, 지배자도 결코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자기 식민지화·자기 영토화 끝에 제국화되고 타자를 식민지화·영토화하게 되는 것을 걱정하고 그 심통·고뇌가 소세키의 내장을 몹시 손상시킨 것이다.

한편 루쉰은 오랜 역사를 가진 문명 자체가 중국인을 식민지화·영토화 시켰다고 보았다. 그래서 ‘광인일기(狂人日記)’, ‘아Q 정전(正傳)’, ‘공을기(孔乙己)’ 등의 소설을 통해 중화문명의 질곡에 의해 식민지화·영토화된 인간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내고 중국 인민들을 일깨우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름부터 가을에 걸친 국제학술회의와 강연을 통해 김태창 주간이 거듭 강조한 또 하나의 기둥이 ‘활명연대(活命連帶)’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생명을 살리고 연대하는’ 것이다. 영성을 논하고 영혼의 탈식민지화·탈영토화를 논의한 것도 그것이 단지 이야기로 끝나버리면 별로 의미가 없다. 과거의 사상적·문화적·문학적 유상을 오늘날로 새밝힘하는 것을 통해 우선 한일이, 되도록이면 한중일이, 그리고 세계의 민중과 민중이 국경을 넘어서 서로의 생명을 살리게끔 연대하고 보다 밝고 바람직한 미래를 함께 여는 것, 즉 ‘미래공창(未來共創)’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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