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기 논설위원 / 한국교통대 교수

(홍연기 논설위원 / 한국교통대 교수) 어릴 적 큰 시험을 앞두고 철없는 마음에 학교에 무슨 일이 나서 시험을 치루지 않았으면 하는 불경한 상상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물론 상상은 이루어진 적이 없었고 시험은 예정대로 치루어졌다. 그런데 11월 16일로 예정된 수학능력 시험을 하루 앞둔 11월 15일 경북 포항에서는 진도 5.4의 지진으로 인해 약 60여명의 부상자, 1500여명의 이재민이라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대학 건물의 벽면이 무너져 내리고 아파트에 균열이 발생하는 등 지진 관련 피해가 늘어나면서 당초 16일로 예정된 수능이 제대로 실시될지 의문이었다. 다행히 교육부에서는 지진 발생 당일 긴급 브리핑을 통해 16일 예정이었던 2018학년도 수능을 23일로 연기한다고 발표함으로써 포항 지역 수험생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정부가 당장의 수능보다 수험생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사실 수능 연기는 이번이 최초는 아니다. 2006학년도 수능은 2005년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아 태평양경제공동제(APEC) 정상회의로 인해 당초 계획했던 11월 17일에서 일주일을 미룬 11월 23일에 시행되었다. 또한 2010년에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문에 11월 11일로 예정되었던 수능시험을 일주일 늦춰진 11월 18일에 실시하였다. 똑같은 수능 연기이지만 이들 두 사례는 국제 행사를 앞두고 사전에 충분한 기간을 두고 공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문제나 동요는 없었다.

그러나 올해 수능 연기는 예상치 못한 자연 재해로 인한 갑작스런 것이어서 수험생들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일부 언론에서는 이번 수능 연기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온 것처럼 보도하기도 하였다. 가령 수능 연기로 인한 ‘수험생 대혼란’, ‘재수생이 3수하는 기분’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수험생 및 관련자들을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하는 기사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실제로 일부 수험생들은 수능일에 맞추어 그간 컨디션을 조절해왔다는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심지어 수능을 앞두고 홀가분하게 수험서를 미리 정리했던 학생들은 다시 쓰레기통을 뒤져야만 했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학원가에서는 남은 일주일을 이용한 수능 특강을 개설하여 지진조차 비즈니스 기회로 활용하는 우리나라 사교육의 엄청난 대응능력을 보여주었다. 수요에 맞춰 사교육 상품을 만드는 것을 마냥 탓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불안한 마음을 극대화 시키는데 국가적 재앙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소위 말하는 지진 특강은 상술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차마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3년 전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의 공감능력이 얼마나 바닥으로 떨어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책임을 져야할 관계자들은 책임회피에 급급하였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유가족들의 광화문 농성장 바로 앞에서 폭식투쟁을 벌이는 몰지각한 사람들은 인간성 상실 그 자체였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각다분하게 각자도생만을 외쳤던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 세월호를 통해 극대화 되었던 것이다.

수험생들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의 이번 수능 연기 결정은 효율보다는 안전을 우선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또한 지진의 아픔을 겪고 불안해하는 포항의 수험생에게 이번 수능 연기는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그리고 국가가 자신들을 배려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었을 것이다. 59만명이 불편해도 6000명의 포항지역 수험생을 버릴 수 없었다는 정부의 판단을 우리 사회가 포항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차원에서 기꺼이 동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삭막하기만 했던 우리 사회에 공감과 연대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측은지심을 갖고 있다. 측은지심은 타인의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공감의 실천은 사회적 연대로 이어진다. 올해 수능 연기를 통해 수험생들은 개인적인 아쉬움을 넘어 지진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에 빠진 친구들과의 공감과 연대를 배웠으리라 믿는다. 포항의 수험생 역시 우리 사회가 결코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공감과 연대의 가치를 몸소 느끼고 실천한 2018학년 수능 수험생 모두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다. 훗날 ‘응답하라 2017’을 제작한다면 이번 수능 연기는 더불어 함께하는 우리 사회의 따뜻한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공감과 연대를 몸소 실천한 우리 수능 수험생 모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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