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철학의 대화를 열어준 프랑스 현대 철학자

동양포럼 운영위원회가 그리운 세계인의 첫 번째 순서로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1906~1995년)를 선정, 그의 삶과 뜻을 기리는 좌담회를 지난 4월 19일과 5월 1일 두차례에 걸쳐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열었다.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는 그리운 세계인의 첫 번째 순서로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에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1906~1995년)를 선정, 그의 삶과 뜻을 기리는 좌담회를 지난 4월 19일과 5월 1일 두차례에 걸쳐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열었다.

 레비나스는 후설의 현상학(現象學)과 유대교의 전통을 바탕으로 서구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을 비판하며 타자(他者)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윤리설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이번 좌담회에는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윤대선 경기대 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 김영미 시인이 참석했다. 좌담회의 내용을 요약·정리해 싣는다.<편집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이번에 동양포럼에서 ‘그리운 세계인’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프랑스 현대의 철학자 레비나스를 선정하게 됐습니다. 그러면 왜 레비나스를 주제로 한 좌담을 굳이 청주에서 하는 것인지를 먼저 설명 드리겠습니다. 저는 일본에서 20여 년간 공공 하는 철학대화를 계속해왔습니다. 일본사회는 가장 타자가 없는 세계입니다. 자기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기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같지 않으면 나쁜 것이다”라는 생각이 특히 심해요. 그래서 일을 하는 데 굉장히 애를 먹었거든요. 공공철학은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세계를 보고 인간을 살피고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공공성이라는 것이 서양의 개념을 한국, 일본이 수입한 것인데, 저는 그게 아니고 생활의 터전에서 신체 감각적으로 자기와 타자가 함께 하는 개념으로 규정해서 서로 공유하는 철학이라는 뜻으로 공공 하는 철학대화를 시작한 겁니다. 실은 30여 년 전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 학자들로부터 레비나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중 젊었을 때 읽었던 동양의 장자와 레비나스가 200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의 다른 사상가들과 장자가 다른 점은 다른 사람들은 자기동일성의 철학인데 비해, 장자는 타자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레비나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장자의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입니다. 갑자기 그동안 보지 못했던 바닷새가 왕궁으로 날아들었습니다. 노나라 임금이 굉장히 귀한 것이라 생각하고 새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고 갖은 호사를 하게 했지요. 그런데 그 새가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 죽었어요. 이것은 원래 장자가 제자하고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겁니다. 장자가 제자에게 “어디가 문제인 줄 아느냐”고 묻지요. 그리고 설명하기를 “노나라의 임금님은 자기가 사는 방법으로, 자기가 좋다고 생각한 것을 새에게 강요했다. 새는 새 나름의 삶이 있고 새 나름으로 살아야 하는데 인간에 맞춰 억지로 하려고 했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고 말입니다. 여기 이 이야기는 세 개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첫째는 뜻하지 않게 바닷새가 날아왔다. 우연한 만남. 능동적이 아닌 수동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죠. 그 다음은 인간의 삶과 바닷새의 삶은 서로 다른데 인간의 삶을 기준으로 바닷새를 동화시키려 했는데 어느 정도는 하려고 하다가 지나치니 죽을 수밖에 없었다. 타자를 자기가 이해하는대로 자기에게 맞춰서 동화하려고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타자라는 것은 자기가 이해하고 자기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타자의 필요에 맞춰가면서 상생 공복의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일본에서 일본인들과 공공하는 철학대화를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처음단계부터 자기와 타자의 사이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대화란 타자와 자기와의 언어행위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청주에서 소중고교의 교육을 받고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프랑스에서 레비나스를 만났고 자기와 타자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 한국 청주에서 그리운 세계인 시리즈의 첫 번째로 레비나스를 선정하게 된 것입니다. 레비나스를 전문가로서보다 인간으로서, 지금 여러 가지로 타자 문제가 소홀히 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타자 문제를 진솔히 생각해보자는 뜻에서 레비나스를 거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김영미 선생과의 만남이 새로운 인문학은 문학과 철학의 대화? 문학을 철학으로 풀고철학을 문학으로 표현하는 데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방법자세를 실지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김영미 선생이 정지용에 대한 해석을 레비나스를 통해 한다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김 선생의 책을 받아 한 달 정도 정독했습니다. 충북 옥천군에서 살면서 우리나라 근대시의 아버지인 정지용을 레비나스를 매개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요. 레비나스 이해도 쉽지 않은데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승화시킨 정지용의 문학을 레비나스의 철학으로 풀어본다는 것은 일찍이 아무도 생각해본 일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의 대화는 김영미 선생의 말씀으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김영미 시인

김영미 시인 “문학을 전공한 제가 철학을 논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2009년 우연히 ‘시간과 타자’라는 책을 접하면서 레비나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그 당시 철학에 끌려 하이데거에 빠져 있을 때라 존재와 실존, 주체와 타자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어요. 언제부터인지 저도 모르게 레비나스에게 빠져들었어요. 물론 번역본으로만 레비나스를 읽었지만 좀처럼 헤쳐 나올 수 없었지요. 이후 일 년 넘게 스터디를 하면서 레비나스를 만났고 그런 중에 정지용 시인과 묘하게 겹쳐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겁도 없이 레비나스 사유로 정지용 시를 해석하기로 결정했고,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책으로 만난 레비나스를 여기 계신 분들과 대화를 통해 다시 만나고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어느 누구도 말해 준 적 없는 철학자, 그리고 문학을 문학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문학을 철학으로 풀어내고자 했던 쓸쓸한 시간을 버텼던 것은 ‘레비나스와 정지용’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은 뒤에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래선지 목적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그저 마음에서 일어난 공부를 했습니다. 여고시절 문학소녀였던 저는 서울에서 내려와 시골 마을 옥천에서 ‘시’라는 타자를 열망하다 학문에 도전해서 정지용이라는 타자를 만났고, 레비나스라는 타자도 만났습니다. 문제는 혼자 하는 공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 우연히 김태창 선생님을 만나면서 몇 차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레비나스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정지용의 시에 나타난 무한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에 관한 것입니다. 정지용은 한국근대시의 역사에서 감각적인 시인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의 감각이 지닌 매우 중요한 측면은 감각이 주체가 대상의 우위에 서서 대상을 통제하거나 주체에게 대상을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이 대등한 관계이거나 우러르는 관계에서 직접 체감하는 행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의 감각은 감정과 지성을 결합시킨 것으로 이해됩니다. 정지용이 세계를 체험하는 감각은 닿음에 있습니다. 그에게 시 쓰기란 미지의 세계를 맞닥뜨리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문장을 이해하고 그 의미들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서 어떤 사건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얼굴과 대면한다는 것, 어떤 눈물과 핏자국을 본다는 것, 결국 어떤 발자국 소리와 절규를 듣는 다는 것입니다. 정지용은 다만 현실에 묶여 있거나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거기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고 저항할 수조차 없는 우리 삶의 존재조건을 묻고 있습니다. 그의 주체관은 세계에 존재하는 주체의 실존적인 조건을 통해 시간과 죽음 그리고 신에 내재된 통시적인 초월의 가능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초월적인 감성과 내재적인 욕망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체는 유한적인 존재며 물질적인 세계에 의존해야 하는 실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체가 보편적인 무한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칫 불가능한 문제로 보입니다. 실제로 정지용은 연약한 감성적주체로서의 갈등과 고민으로 끊임없는 시세계의 변화를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지용의 시에서 무한성과의 상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제시되는 지를 세 가지 의미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정지용의 시에서는 레비나스처럼 전체성이 아닌 무한성이 두드러지게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한을 향한 동경은 향수로서의 그리움으로 제시됩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개인의 영역을 확보하면서도 공동체적 공공의 영역, 즉 풍속과 생활의 영역에서 유효합니다. 이는 어떤 개인적인 취향인 인상을 넘어선 공공성을 전제할 때 작동하는 감각을 말하는데, 그의 시에서 타자를 인물화가 아닌 풍경화로 옮겨놓고 있습니다. 이때 풍경화로 이루어진 세계는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정지용은 감성적인 상상력으로 자신을 존재케 하는 대상을 향유하면서 소박한 말씨 속에 담긴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와 공감을 발견하고 경험했습니다. 어린 시절 “신라천년의 푸른 하늘을 꿈”(‘석류’)꾸며, “하늘바래기 하늘만 치여다 보다가 /하마 자칫 잊을뻔 했던 / 사랑”(‘비둘기’)도 키워나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근대에 대한 회의와 불안 등 소위 주체성의 위기의식과 동궤에 됩니다. 그런 까닭에 시적 본질이 인간이해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에서 출발하여 그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적 모색과 공동체의 붕괴와 그에 따른 고립된 개인에 대해 사유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공동체의 붕괴 과정을 목도하면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삶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운명에 처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생명과 존재에 대한 심층적인 사유를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이 시 ‘향수’에 녹아 들어가 있기에 어느 누구에게나 호소력 있게 다가와 공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대한 동경은 시세계 전반에 다채롭게 그려지고 있는데, 최초의 작품 ‘풍랑몽’에서 이미 예견된 것처럼 보입니다. 이 시에서 동경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언제나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 여기와 먼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로 부터 일 년 후 ‘향수’를 발표했는데 이 시에서 현상이 아닌 가져진 것, 말해지지 않는 것, 그래서 우리 속에 드러나지 않는 것, 이것을 같이 볼 때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장소를 점유하고 있다는 것은 독특성을 지닌 유한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독특성은 현대 철학에서 동일성의 지배를 비판하고 그에 반하는 세계관을 제시하기 위해 즐겨 쓰는 개념입니다. 정지용의 경우, ‘향수’라는 공존의 영역을 확보하고 가족들이나 마을공동체에 대한 경험들이 특정한 자리를 점유합니다. 이러한 유한성과 독특성은 보편성과 세계화라는 거대담론에 대한 하나의 미시적 저항으로서 지역성과 구체성, 그리고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 내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향은 자신에게 속하면서도 자신을 넘어 저 먼 곳까지 이른다는 느낌은 광활함의 감각입니다. ‘향수’는 자신의 특정한 사건이나 기억을 회상하고 그것이 불러들인 과거로 돌아가 기억의 특정 영역에서 펼쳐지고 주체의 고유한 서정성을 드러냅니다. 정지용에게 ‘향수’가 부여하는 의미는 새로운 관계를 위해 떠나는 것에 대한 긍정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자아의 정체성을 향해 물음을 던지는 ‘타자’의 성격은 자아의 내면을 타자화하여 그 대상 속에서 자기를 새롭게 인식해 나가는 태도입니다. 둘째는 정지용의 시를 통해서 레비나스적 의미에서의 질문과 기도로서 절대타자인 죽음과 신과의 마주침입니다. 정지용은 자기 사유의 고유한 지평 속에 죽음이라는 사건을 만납니다. 그의 시에서 자식의 죽음과 관련된 작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시인 자신이 자식을 여럿 잃은 특별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입니다. 특히 1927년에서 1930년경에 두 명의 자녀는 꽤 자라서 잃은 것으로 그 충격과 슬픔은 대단히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은 버려지고 다스려지면서 시적 이미지로 승화되고 이런 과정에서 창조된 시는 현실과 먼 거리에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의 한가운데를 응시하고 위로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죽음은 타인의 얼굴에서 열리고 그 의미는 타자와의 관계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무한과의 관계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에 갖는 책임입니다. 그 모습은 타자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개입의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타자에 의한 주체의 이러한 찢김을 윤리적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인 구조를 떠나서 무한성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주체가 무한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유한적인 자신 속의 자아를 떠나서 타자적인 관심으로 나가는 행위에서 가능하며 나와 구분시키는 대상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신에 대한 관념이 등장합니다. 정지용의 종교시에서 유한 안의 무한은 묻는 자의 균열로 나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함 속에서의 의식적 주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거기서 주체는 분열됩니다. 그런데 초월에 의해서 깨어남으로서의 시간은 불안정하여 주체의 휴식하는 심장을 뒤흔들며, 어떤 이해로도 환원되지 않습니다. 정지용의 시에서 자아가 절대 타자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그 관계는 우주적이고 존재론적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갑니다. 그러나 절대 타자는 낯설고 충격적으로 등장하는 ‘밖’의 존재가 아니라 ‘내 안’에서 발견되는 존재입니다. 절대 타자의 출현은, 내 안에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던 어떤 다른 나가 새로운 존재로서 개방되는 것입니다. 정지용은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존재론적 사유에서 인격적 혹은 윤리적 사유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신의 주체성이 부정된 자리에 새롭게 현현하는 절대 타자인 ‘신’을 발견합니다. 이를 통해 생명의 긍정, 보편적인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내재적 가치를 지향하는데 그것은 인내와 견딤, 신을 향함으로서의 시간, 기다려지는 것이 없는 기다림, 항상 타인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기다림의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무한을 견디는 방식으로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자를 욕망하거나 기다리는 상황에서 자아는 휴식 속에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내와 뒤흔듦으로 절대 타자와 나의 관계는 책임으로 바뀌게 됩니다. 죽음에 대한 질문은 그 자체로 고유한 응답입니다. 그것은 타자의 죽음에 대한 나의 책임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을 구성하는 것이 윤리적입니다. 겨누어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무한을 향한 자아의 방향 전환은 질문이며 응답이기도 한 질문입니다. 질문과 기도 이것은 대화에 앞선 것으로 윤리적 책임으로서의 응답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종교시에서 내재적 정체성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휴식 속에 머무는 것의 불가능성입니다. 내적 정체성은 바로 윤리적입니다. 종교시 이후, 감각으로 출발한 그의 시세계는 감성적 사유와 삶의 사유를 통합하여 실천하려는 의지로 그만의 풍경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 세계는 이상적 지향으로서의 산과 대면하는 방식입니다. 감각적 공동체를 시적으로 구현한 풍경은 대화하는 자아의 타자적 시선을 통해 발생합니다. 자아와 타자는 서로 응답하며 서로를 비추어주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가 동양적 몰아일체의 세계나 조화의 공간을 완벽하게 부활시킨 세계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세계는 현실을 초월한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번뇌와 갈등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삶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정지용은 사물의 구체적 형상이 아니라 마음을 그려 보임으로써 풍경의 밖을 작품 안에서 움직여 살게 만듭니다. 이때 마음이 통한 풍경의 체험은 자아와 타자를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말하지 않는 것들을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의 시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이란 말입니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늘 타자와의 긴장 속에 놓여 있으며 타자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묻는 근대적 자아의 존재로부터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연을 이념의 현현으로 형상화하지 않고, 처음부터 근대적 의미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등장합니다. 바다에서 산으로 그 대상이 변하하는 과정에서 실제의 풍경과 감성적 상상력은 그 너머의 상상적 풍경의 공간으로 창조되고 있습니다. 산수시에서 초월의 의지에 대한 시인의 자세와 현실적 시름이 공존하는 것은 자아와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타자의 외재성을 유지시켜 가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 오오 견듸랸다’(‘장수산 1’) 라는 삶의 의지로 ‘슬픔’도 ‘꿈’도 없는 현세적 삶에 대해 꼿꼿한 자세를 보입니다. 인간은 안으로 향하여 자기중심적 내면성을 유지하는 존재인 동시에 밖으로 향하여 타자를 향한 존재로 공존한다고 볼 때, ‘산’을 통해 주체를 압도하는 자연의 절대성에서 그 장엄함과 대비되는 인간의 유한성도 함께 드러납니다. 하지만 욕망의 겹침은 절대적 공간에서 상징적 공간으로 그 의식의 변화를 거치면서 변화된 이기적 욕망의 비움으로 나타납니다. 셋째, 정지용의 시에서 레비나스를 연상시키고 나그네의 고유한 응답으로서의 ‘향수’를 체감하게 됩니다. 정지용 시인은 수많은 타자들과의 만남을 동경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의 푸른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았던 ‘어린 나그네 꿈’(‘오월소식’)을 키우러 타향에서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 鴨川’)을 견뎠습니다. 그것은 낯선 곳, 낯선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과 열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근대라는 현실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삶에서 슬픔을 벗으로 삼으며 외롭고 고독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그네길’(‘임종’)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정지용의 감성에 기초한 시적상상력이 무한을 향한 동경으로 그려진 것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지향하는 삶의 태도에 있습니다. 시 전반에 걸쳐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삶의 존재론적 욕구에서 형이상학적 욕망으로 이어진 윤리적 가치 지향은 새로운 관계를 위한 모색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비극’의 흰 얼굴”(‘비극’)을 하고 오실 손님일지라도 “오랜 후일에야 평화와 슬픔과 사랑의 선물”을 주실 거란 믿음으로 갖고, 그 손님을 위해 “맞이할 예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의 무한한 모습은 우리의 정서를 압도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 모순된 정서적 효과 즉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일으킵니다. 가늠할 길 없는 자연 앞에서 자기 몸이 보잘 것 없으며 그 삶도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그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로 하여, 희망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숭고함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정지용이 추구한 세계는 진실에 대한 욕구의 표현으로 이해됩니다. 그의 시에서 감성적 주체의 무한성의 경험은 진실하고 신성한 것이기에 꿈꾸기이며, 기도이고 소망입니다. 정지용 시인은 인간들 사이의 공동존재 조건의 물음으로 나와 타자,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를 탐구했고, 나와 타자 사이에서 그 사이의 관계를 의문에 묶어놓은 궁극적 전망을 보여주며 사회적·이념적 계기 너머의 세계를 지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타자와의 관계 맺음의 사건을, 공동체의 드러남을, 인간들 사이의 움직임과 공동체구성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다 건너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조국의 국토를 기행하며 겨레의 정신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정지용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의 오랜 생명력을 자랑하는 옛 전통에서 무한과 절대적 가치를 찾아내어 현대적 시각에서 분석했고, 동양정신을 계승함과 동시에 옛 것과 새로움 사이에서 탐구했습니다. 복합적인 형태인 인간의 감정을 감성적인 시어로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서로의 공존과 모두의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정지용은 시적언어로 세상과 대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료성이 결여된 불안한 대화로 혼란을 초래하고, 혼란을 빚는 소리는 죽음에 직면한 실존의 불안을 상징하게 됩니다. 그러나 변화만이 진리임을 뚜렷이 보았을 때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창조를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한하다는 것만이 창조적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반성적인 질문을 통해 시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주체의 세계 인식을 둘러싼 시적 문제의식을 첨예하게 드러냈습니다. 정지용 시인은 50평생 170편이란 작품을 남겼습니다. (‘정지용 전집1-시’, 최동호, 2015) ‘현대시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것에 비한다면 그리 많은 작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시는 우리말로 씌어져야 한다고 열렬히 자각’에서 비롯된 시어는 발명이란 이름에 값할 만큼 창의적이고 개성적입니다. 민족어 위기의 시대에 그처럼 모국어를 찾아내어 갈고 닦은 사람은 그 이전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고유성으로 마을과 마을을 잇고, 정신과 정신을 이어 새로운 세계를 열었습니다. ‘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그의 시는 모더니즘이나 가톨릭 문학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 모국어를 되살려 한민족의 정신을 이으려는 총체적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

 

윤대선 경기대 교수

윤대선 경기대 교수 “김영미 시인께서 레비나스 철학을 정지용의 시를 통해 멋지게 체험적으로 이해하신 것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갖습니다. 김영미 선생이 말씀하신 무한을 향한 동경은 김태창 선생이 문학과 철학의 대화를 알차게 실현시키는 아주 좋은 테마라고 생각합니다. 무한을 향한 동경은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언제부터 비롯됐을까요. 플라톤도 항상 그리움을 갖고 그것을 추구하는 철학자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영혼을 갖고 있어요. 그 영혼의 원천은 내가 태어나기 전 이데아의 세계 속에 있어요.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욕망이 동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그리움과 욕망은 존재의 원천적 분리라는 사건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는 일신주의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고 척박한 세계에서 나에게 생명을 주었던 위대한 분에게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여기에 생명의 원천은 그리워하는 철학적인 바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타자의 얼굴은 레비나스 자신이 만들어낸 트레이드마크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유태인들은 번듯한 성전을 갖추고 기도드릴 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갖지 못했던 그런 역사가 있는 거죠. 이웃이나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겠죠. 서로 얼굴을 통해 신의 계시,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펴갈 것인지 타인의 얼굴에서 영향 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내 앞에 있는 성전에서 다리를 조아리고 무한한 희생과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관계, 이 관계는 바로 나와 신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신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통해 신의 존재를 경험한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중요한 철학적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영미 선생의 말씀은 레비나스 철학의 상큼한 제시라고 생각해 상당히 흐뭇했습니다. 정지용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함께 레비나스에 대한 지적인 관심이 어우러져 좋은 글을 소개해 주셨다는 생각입니다. 물질적 세계 속에서 타자를 만나는 것은 마치 신을 만나는 것과 다르지 않고, 영원한 무한성을 만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정지용 시인의 감각적이고 다양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무한한 이해라는 것이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섬세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함께 있음입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타자 없이 존재한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고독에 찌든 시간밖에 안 되는 겁니다. 타자라는 것은 나의 생명을 뒷받침하는 것이기에 타자가 없다면 나의 존재는 매우 무의미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에 있어서는 자기 생명의 기원이 타자에게 비롯된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이해한 실존의 본질입니다. 덧붙여 현대 철학에서 사르트르 같은 실존 철학자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실존이 바로 죽음이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발전했습니다만 나의 의식 저변에는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의 본질. 나의 의식 근저에는 무라고 하는 것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레비나스는 실존의 본질은 죽음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타자성이라고 합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켜 타자는 생명의 기원이고 신으로부터의 그 기원을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다름아닌 타자를 통해서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김 선생 말씀 중에 “자아와 타자는 서로 응답하고 서로 비추는 관계에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에서도 매우 시사성 있는 나와 타자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6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투게 되죠. 이 때 모세는 시나이산에 가서 십계명이라는 신의 계시를 갖고 내려옵니다. 최초의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토라를 갖고 내려옵니다. 영적인 신의 말씀인데 이것을 갖고 내려와 모세는 60만 명의 백성 앞에 공동체 윤리를 구성하는 근원적 가치로 제시를 해야 하고 그 말씀에 따르도록 사람들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됐죠. 그렇다면 토라라는 신의 말씀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했을까요. 당시는 마이크가 없어 60만 명을 앞에 모아 놓고 그 말씀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모세가 십계명에 관한 신의 말씀을 주변에 있는 타자에게 얼굴을 보며 전달했고 그 타자들이 다른 타자들에게 얼굴을 보며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토라라는 영적인 진리가 전수되는 과정입니다. 타인의 얼굴이 타인의 얼굴에게, 계주할 때 바통이 전달되듯 전한 겁니다. 영적인 암시와 이해를 통해서 60만 백성에게 신의 말씀이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타인의 얼굴이라는 것은 영적인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교회에 가죠. 영적인 말씀을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와 성당에서 성스러운 말씀의 전도가 이루어지듯 서로 얼굴을 보며 전수했던 역사가 존재했던 겁니다.”

 

김 시인 “그렇다면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주려고 했던 궁극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윤 교수 “단적으로 말하자면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21세기 타자철학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에는 인간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궁극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레비나스의 탈무드 주해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둠이 나를 둘러싸고 낮의 빛이 나에 대해선 어둠으로 뒤바뀌어도 그 어둠일지라도 당신에 대해선 어두컴컴한 것이 아닙니다. 밤은 낮과 같이 빛이 나고 그 어두컴컴함은 당신에 대해선 밝음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허리를 주조했고 나의 어머니의 은밀한 곳에서 나를 매만져 주신 것도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렇듯 놀랍도록 각별케 해주신 당신에게 은혜를 드립니다.”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생명을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와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듯 세상을 살면서도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큰 사랑의 위대함은 구원이죠. 신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자유의 길을 열어주신 것이 더 큰 사랑입니다. 레비나스의 입장에서 타자철학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책임감입니다. 이 메시지와 관련된 한 부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이미 완전하게 만들어진 우주 안에 들어 왔고 벌 받은 첫 번째 인물이다. 인간은 자기가 하지 않은 것에 응답해야 한다. 인간은 우주에 대해 책임이 있고 피조물들에게 볼모로 잡혀있다.” 그에 따르면 생명을 얻고 태어난 순간부터 나 이외의 모든 것들로부터 이미 연유돼 내가 존재합니다. 나는 선택된 존재이므로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한평생 살기 위해 태어난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세상은 타자들로부터 빚어지고 그 위대한 분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면서 세상에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은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 낳았던 실존주의를 배경으로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의 전통에서 레비나스는 전통적인 영감을 얻었습니다. 하이데거,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실존의 세계가 레비나스 철학의 배경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신적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은 고독, 분열적인 자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질 속에서 자신의 존재 원인을 찾아가면서 타자가 깊이 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데카르트 시대에는 심신이원론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인간의 주체를 형성하는 두 가지인데, 정신성이 매우 중요한 주체의 본질을 만들고 있죠. 레비나스로 오면서 타자라는 존재가 주체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타자라는 주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폅니다. 언어라고 하는 그물망 속에 그 타자가 나에게 들어와 있고 내가 무언가를 갖고 싶어 욕망하는 것은 내 안의 타자들이 욕망하는 것이라는 게 라캉의 타자욕망입니다. 레비나스의 타자욕망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의 타자가 아니라 나의 의식 바깥에 있는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바로 타자라는 것입니다. 라캉의 타자는 무의식속에 있고, 레비나스의 타자는 주체 바깥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자의 얼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본성은 신으로부터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완전하죠. 나의 무의식 속에 들어와 있어서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나의 본성에 심어져 있어 있고, 이성은 신으로부터 받은 완전한 능력입니다. 레비나스의 퍼펙션은 어디에 있냐. 라캉 같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신의 계시가 비춰지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퍼펙션이 데카르트와 레비나스에 있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느냐 하는 것이 데카르트, 라캉의 철학과 비교되는 중요한 점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의 타자철학이 신 중심적인 철학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철학이라는 것을 논해야 합니다. 바로 타인의 얼굴을 통해 신의 계시를 구하고 신의 말씀을 듣는 거잖아요. 신에 대한 존경스러움, 경외감은 타인에 대한 경외감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타자의 얼굴은 신의 얼굴이 비춰진 것입니다. 내 옆의 타자가 바로 신의 출현이라고 하는 겁니다. 타자 자신이 신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신의 빛, 말씀이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에게 제시된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획일화된 계시가 아닙니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현대 윤리학의 새로운 전환을 주고 있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해야 할 보편적인 명령이 아니라 내가 타인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맞이하면서 윤리의 원천을 새롭게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인의 얼굴이 윤리의 기원이라고 얘기합니다.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은 윤리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로댕의 ‘성당’이라는 작품을 보면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라는 이미지는 볼 수 없거든요. 그런데 왜 제목이 성당일까요? 성당이 건축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날 수 있는 성스러운 장소이죠. 성당 밖에서 우리의 삶은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마주하는 삶이죠. 그런 삶 속에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 건축물로 만들어진 성당 속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이 사랑하는 삶 속에 성당이 있다. 그리 보면 두 사람이 손을 마주하고 있는데 신이 있는 곳에 성당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자 사이의 윤리는 나와 타자가 함께 있는 곳, 두 사람을 보살피고 축복해주는 신이 있는 곳이 타자 세계입니다. 레비나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는 하나의 존재이면서 둘로 이뤄진 존재이다. 실재의 한가운데 있는 분열, 찢겨짐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주체와 타자는 각각 둘이 아니라 본래는 하나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움’ 또는 에로스로 불리는 타자에의 욕망은 그런 분열과 찢겨짐을 치유하며 심지어 자아의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형이상학적 사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는 나 바깥에 있으며 나와의 사적인 관계를 넘어서 있는 절대적인 타자입니다. 관계의 중심은 타자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이’는 주체가 배제된 타자의 세계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이’는 근본적인 주체성의 실현을 가져올 수 있는 초월의 공간이며 나와 타자가 소통할 수 있는 공공세계(公共世界·public-common world)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생명이 존재하는 공공의 터전입니다. 여기서 모든 윤리는 생명의 가치와 호흡합니다. 둘째, 공공세계는 나와 이웃한 삶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이런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삶의 가치는 타자와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윤리를 요청하며 이런 가치는 사회 공동체가 추구하고자 하는 선의 가치를 타자중심에서 새롭게 구성합니다. 그런 세계에서 ‘나’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정립되기 때문에 나와 이웃의 관계는 이미 낯선 타인의 관계가 아닙니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도 자아는 이웃한 자아(soi prochain)입니다. 즉 인간의 자아와 윤리는 서로 이웃한 타인들과의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나스에게 있어 모든 가치의 중심은 나와 이웃한 타인의 얼굴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가치를 새로운 공공윤리로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 “저 자신이 처음으로 레비나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파리 라데팡스에 살 때 소르본대학의 그리말디 교수님에게 말씀을 듣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분이 데카르트와 레비나스, 데리다와의 관계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에 ‘타자의 타자성이 과연 무엇일까’라는 점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면서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레비나스는 한국적 사유와 굉장히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내재성을 강조하는 사유에 상당히 익숙하기 때문에 ‘타자의 타자성’을 어떻게 한국적 토대 위에 이해할 것인가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레비나스를 정리해 보면 역시 이분은 유태교의 신앙 체계에서 논의를 전개했기 때문에 윤 박사 말씀처럼 ‘토라’라는 신의 말씀과 ‘탈무드’라는 메시아주의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는 접근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유태교의 메시아가 다른 것 같더라고요. 기독교는 교리화돼서 하느님 아들로 온 분에 대한 메시아사상이 뚜렷한데 유태교의 메시아사상은 이게 좀 맥락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은 타자에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인간이 부담할 수 없다면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치유할 수 있는 존재, 즉 메시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혼자일 필요 없고 모든 사람이 메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있다는 것이죠. 한국 토대의 메시아와 다른 독특성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레비나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시 아우슈비츠의 체험을 살펴봐야 합니다. 유태인으로서 특히 부인이 거의 죽을 뻔한 것을 구출한 상황에서 이분에 있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요소가 자기 결정권이 없었다는 강한 환경적 요인이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아우슈비츠 체험을 얘기하면서 소크라테스주의는 폭력이라고 합니다. 서양철학이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주석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서양철학 사상의 원전인 소크라테스 사상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고 소크라테스주의는 폭력성에 기반을 둔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울 정도의 정통적 서양철학에 대한 선전포고입니다. 왜 이렇게 됐는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은 서양철학의 소크라테스 후예들은 자아를 세우고 자아의 경계를 넓혀 자아동일시를 확산하고 하나의 정체성으로 확장해 가는 데서 부지불식간에 폭력의 철학을 구축해 왔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철학의 한 결과가 독일 상황에서 아우슈비츠 참극이라는 역설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참극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정통적인 서양철학을 완전히 해체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고서는 그 원인이나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김 주간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로운 인문학의 기본과제로서 시의 철학과 철학의 시의 가능성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레비나스의 타자철학-타자윤리-타자신학의 핵심을 정지용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구에서 더 깊게 체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전체성이 아닌 무한성을 향하는 동경? 향수? 그리움은 ‘흙에서 자란 내 마음 / 파아란 하늘빛이 그립어’(향수)’에서, 인간존재의 근본상황으로써의 고향상실은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 대리석 테이블에 닷는 내 뺨이 슬프구나! (카페프란스)’에서, 그리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길 떠난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는 진실은 ‘거기 아무 것도 들릴 것을 찾지 못한 적에 조개껍질은 한갈로 듣는 귀를 잠작히 열고 있기에 나는 그때부터 아주 외로운 나그네인 것을 깨달았나이다.(서글픈 우상)’에서 체감·체득·체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레비나스가 그처럼 강조했던 얼굴에 대해서도 ‘얼골(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 / 밤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는다.(나목)’에 그 뜻이 농축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오늘의 대화는 여기서 끝낼까 합니다.”

<정리·박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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