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항일 발자취 따라 걷는 충북의 문화재
시군에 고루 분포된 역사의 흔적... 국가지정 등 779건
영동 쌍굴다리엔 총탄자국... 한국전쟁 아픔 그대로 전해

충북에는 국가지정문화재 177건과 등록문화재 28건, 도지정문화재 487건, 문화재자료 87건 등 모두 779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특히 항일·독립 관련 문화재는 충북지역 11개 시·군에 고루 분포돼 있어 충북출신 인사들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양일보는 창사 26주년을 맞아 독립·항일 발자취 따라 걸어서 만나는 충북의 문화재를 소개한다.

단양 적성비.

●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 新羅 赤城碑)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는 성재산 적성산성 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비로,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인 이 곳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에 30㎝ 정도가 땅속에 묻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비면이 깨끗하고 글자가 뚜렷하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 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제천 자양영당.

● 제천 자양영당(堤川 紫陽影堂)
제천 자양영당(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은 충북도 기념물 제37호로 조선 후기 성리학자인 유중교(1821∼1893)가 후진을 양성했던 곳이다. 고종 26년(1889)에 창주정사로 세웠는데 1906년 유림에서 자양영당으로 새롭게 세웠다. 고종 32년(1895)에는 의병장 유인석(1842∼1915)이 팔도 유림들을 모아 비밀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주자·송시열·이화서·유중교·유인석·이직신의 영정을 모시고 있으며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구조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이곳에는 ‘화동강목’ 판목을 보존하고 있다.

충주 고구려비.

●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충주시 감노로 2319)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다.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해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됐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발견 당시 비면이 심하게 마모돼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증평 연병호 생가.

●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陰城 權近 三代 墓所 및 神道碑)
음성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음성군 생극면 능안로 377-15)는 충북도 기념물 제32호로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양촌(陽村) 권근(1352∼1409)과 선생의 아들 권제, 손자 권람의 3대묘이다.
선생은 공민왕 17년(1368) 성균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공민왕(재위 1352∼1374)이 죽자 정몽주·정도전과 함께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고 창왕 2년(1389)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태조 7년(139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에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해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대제학을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국사략’ 등 조정의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권제(1387∼1445)는 권근의 둘째 아들로 우찬성의 벼슬에 올랐고 ‘고려사’ 편찬에 참여 했으며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권람(1416∼1465)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학문이 뛰어났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3기의 묘 앞에 모두 각각 묘비,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고, 봉분은 모두 원형이다.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207호인 음성 권근 및 경주이씨 묘표도 인근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388에 있다.

●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鎭川 金庾信 誕生址와 胎室)과 길상사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김유신(595∼673) 장군이 태어난 곳과 그의 태실(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170-4)은 사적 제414호로 1999년 6월 11일 지정됐다. 
태실은 아이가 출산한 뒤 나오는 탯줄을 보관하는 곳을 말한다.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만노군 태수로 부임한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김유신 장군의 태실은 태령산성의 정상부에 있으며 자연석을 둥글게 기단으로 쌓고 주위에 돌담을 쌓아 신령스런 구역임을 나타내고 있다. 원형으로 3단의 석축을 쌓은 뒤, 그 위에 흙을 덮은 봉분형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탄생지 뒤편에 있는 태령산성은 태실을 둘러싼 돌담의 성격으로, 고대 신라의 산성 축조술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 인근 진천 길상사(鎭川 吉祥祠·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는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신라와 고려 때에는 장군이 태어난 태령산 아래 장군의 사당에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관리가 소홀하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것을 철종 2년(1851) 백곡면에 ‘죽계사’를 세워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 진천 조명희 문학관과 이상설 생가
진천이 낳은 한국민족민중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1894~1938) 선생의 민족에 대한 애정과 문학혼을 기리기 위해 개관한 포석조명희문학관(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34-17).
포석 선생은 일제의 민족압살 통치에 문학이라는 무기를 통해 문인으로서 가장 당당하게 맞섰던 선생은 더 이상 조선에서 삶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1928년 8월 21일 소련으로 망명해 새로운 문학과 삶을 개척했다. 특히 소련으로 망명했던 기간 동안 선생은 고려인(카레스키야)의 구심점이 됐다. 선생은 언론인과 교육자로서 민족 계몽과 항일 투쟁의 선봉에 서기도 했으나, 1938년 당시 스탈린 정권의 음모에 의해 일제 스파이로 누명을 쓴채 총살형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이러한 업적과 활동상으로 조명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들로부터 항일투쟁 영웅 59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로 탄신 100주년을 맞은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 생가(1870∼1917·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도 눈길을 끈다.
선생은 이시영, 이규형 등과 신학문을 공부했고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통분을 금치 못해 길거리에서 연설한 후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다 1917년 연해주에서 생애를 마쳤다.
가옥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흙벽돌로 쌓고 진흙으로 마감한 초가이다. 40여년 전에 무너졌던 것을 최근에 복원·수리했다.

괴산 홍범식 고가.

● 괴산 홍범식 고가(槐山 洪範植 古家) 
괴산 홍범식 고가(괴산군 괴산읍 임꺽정로 16)는 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1888∼1968)의 생가다.
정남향으로 지어진 건물의 안채 구조는 전체적으로 정면 5칸·측면 6칸의 ‘ㄷ’자형으로 ‘一’자형 광채를 맞물리게 해 광채를 합한 안채는 ‘ㅁ’자형이다.
이 집에서는 금산군수로 재직하다 1910년 한일합방에 항거·자결한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 1871∼1910) 선생이 성장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당시 지역 주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꾀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 가옥은 1730년(옹정 8년)께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고가인 동시에 3·1운동과 관련된 유적이며, 문학사적 유산이자 항일지사의 고택인 귀중한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 증평 연병호 생가(曾坪 延秉昊 生家) 
증평 연병호 생가(증평군 도안면 산정길 21)는 원명 연병호(1894∼1963)의 부친인 연채우(延采羽)의 집으로, 독립애국지사 연병호가 태어나고 성장한 생가인 동시에 만년에 이곳에서 살다가 생애를 마친 집이다.
연병호는 1894년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출생해 1919년 중국으로 망명, 길림성 북로군정서 참모겸 서기로서 국권회복 운동을 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했으며 청년외교단 비밀조직 활동으로 검거돼 투옥됐다. 이후 다시 망명해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으며, 1937년 임시정부에서 활약 중 일본 관헌에 체포돼 징역 8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1948년 재당선됐다.
이 가옥의 특징은 19세기 가장 보편적인 민가의 형식과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초가집으로 돼 있다. 집의 앞·뒤 공간이 당초의 모습대로 남아 있고, 담장과 출입문의 위치도 목격자들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다.

청주 상당산성.

● 청주 상당산성(淸州 上黨山城)
청주 상당산성(청주시 상당구 성내로 124번길 14)은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보은 삼년산성(報恩 三年山城)
보은 삼년산성(보은군 보은읍 성주1길 104·사적 제235호)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돼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돼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해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해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해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 옥천 이성산성(沃川 已城山城)
옥천 이성산성(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산20-1)은 청성면 소재지의 성안 마을에 있는 토성으로 일명 산계리 토성(山桂里 土城)으로 불린다. 금강의 지류인 보청천(報靑川)이 휘돌아 흐르는 강가에 위치하고 남아있는 상태도 양호하며 주변 경관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5세기 무렵에 축조된 토성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된 굴산성(屈山城)으로 비정되는 중요한 산성이다.
신라의 한강권 진출과 통일의 교두보인 삼년산성(三年山城·보은군) 이전의 토성 축조 방법과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470년 신라가 쌓은 석성인 보은 삼년산성 이후에는 대부분 돌로 성을 조성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성산성은 삼년산성 이전의 축성술을 연구하는데 가치가 크다.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영동군 황간면 노근1길 3-2)는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 개근천(愷勤川) 위에 축조된 아치형 쌍굴 교각이다.
한국전쟁 당시 많은 양민들이 피살된 ‘노근리 사건’ 현장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만인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후퇴하던 미군이 영동읍 주곡리, 임계리 주민과 피난민들을 굴다리 안에 모아 놓고 집단 학살을 자행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총탄 흔적(○, △ 표시)이 남아 있어 당시 상황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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