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논설위원/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소설가) 지난 해 12월에 동네 대동계장이 바뀌었다.

대동계장이라는 게 어떤 자리인가? 동네의 우두머리이다. 여기서는 그렇다.

동네에 이장, 노인회장, 청년회장, 부녀회장 등이 있지만 전부 대동계장 아래다. 대동(大洞)이라는 것이 한자대로 풀이하면 ‘큰 동네’ 라는 말이지만 ‘한 동네의 전부’ 라는 뜻도 있고, 계(契)라는 것이 ‘협동단체의 하나로 여럿이 일정한 목적 아래 일정액수의 돈이나 곡식이나 피륙 같은 것을 추렴하여 그것을 운영하거나 불리어 서로 이용하는 것’이고 보면, 대동계(大洞契)는 ‘한 동네 전부의 사람들이 만든 계’이기 때문에 그 장(長) 되는 대동계장은 동네의 우두머리라는 말이다. 이장(里長)은 동네의 행정을 수행할 따름이고, 노인회장은 동리 노인들의 모임인 노인회만의 장이기에 동네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대동계장이 나이가 제일 연장자는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이장보다는 위요 노인회장보다는 아래로 노인회의 일원이다. 대동계장의 자리가 따지고 보면 실속 있는 자리는 아니다. 이따금씩 치러지는 동네애경사 시 동네사람들이 앞장서 내 집일 같이 도와주는 일을 관장하는 일이지만 각자 알아서 발 벗고 나서기 때문에 그리 신경 쓸 일도 아니다.

그래도 이장이나 노인회장을 뽑을 때는 그의 눈치나 한 마디가 동네사람들에게 크게 작용을 하고, 이장은 동네일을, 노인회장은 노인회일을 꼭 이 대동계장을 거쳐 실행한다. 예를 들면, 이번 가을 동네관광지는 어디로 정하면 좋을까? 여름 삼복의 복달임은 보신탕, 염소탕, 삼계탕 중 어느 것으로 할까? 불운에 처해 있는 동네의 아무개집을 어떻게 도와줄까? 어느 정도의 예산으로 할까? 대동계기금으로 할까? 각처에서 들어온 동리적립금으로 할까? 경로당 및 노인회보조금으로 할까 등을 이장과 노인회장이 대동계장에게 일차적으로 묻고 상의해서 동네사람들에게 알리는 식이다. 그리고 그 뒤의 결산처리 결과도 말해 준다.
 이러한 대동계장 자리인데 새로 뽑은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동네사람들의 구미에 안 맞는다는 것이다. 그간 연례행사처럼 행해온 예의 일들을 하나도 안 하는데, 그게 이장이나 노인회장과의 상의과정에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시큰둥해 했다는 것이고, 연말에 하는 대동계결산도 그가 자리에 오른 이래 2년이나 안하고 있으니 이건 필경 무슨 깜깜이가 있지 않느냐는 거다.

그래서 새로 뽑힌 사람이 66세의 정 씨이다. 정 씨는 그간 중단됐던 동네사람들의 여망이었던 동네행사를 모두 부활시켰다. 새해 1월 하순엔 노인회장과 상의해서 수안보에서 온천을 했고, 지난봄엔 이장과 상의해서 남해안으로 동네관광을 다녀왔고, 올여름 삼복엔 노인회장과 상의해서 초복엔 삼계탕, 중복엔 염소탕, 말복엔 삼계탕으로 치렀다.

가을에 또 한 번 관광을 갔다 오기로 상의가 돼 있고, 자식들 먼저 앞세운 감나무집 윤 씨 할머니도 금일봉으로 도울 예정이다. 먼저 번 대동계장의 소위 비리라는 것에 대해선 본인이, 무능의 소치에서 비롯됐다는 걸 참회하고 사과한 걸 충분히 동네사람들에게 납득시켰는데, 사실 그러하게 된 데에는 동리 어른들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대동계장이 되고 한 이레 뒤에 경로당 남자방엘 들린 적이 있다. 동리어른들의 조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마을의 중책을 맡게 돼서 힘들겠네. 하지만 일념통천(一念通天)이란 말 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하면 하늘도 감동시켜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다니 열심히 하게나.” “먼젓번 대동계장이 우리를 찾아왔네. 마을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모든 게 다 자기가 무능해서 그랬다고, 이제 후회가 된다고, 그렇다고 대동계금이라든가 동리기금에 눈독들인 일은 절대 없다고, 마을 분들의 결정에 충격을 받고 마을을 뜰까 하다가 나를 길러주고 살펴준 데가 여기라는 걸 생각하니 차마 나이 들어 저버릴 수가 없었다고, 그러면서 여하튼 마을 분들에게 심려를 끼친 점 백 번 사과드린다고 눈물까지 흘리더라고.” “그런 마당에 그를 어찌하겠나? ‘오랜 원수 갚으려다 새 원수 생겼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옛날 어른들의 말이 꼭 맞네.

무슨 일에나 보복을 하고 앙갚음을 하면 그 뒤가 더 좋지 않다는 말 아니겠는가?” “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피로 피를 씻다’라는 말말이야. 좋지 않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또 다시 좋지 않은 일을 거듭하는 일이 있는데 그럭하면 안 된다는 거지. 명심하게.” 이런 조언을 듣고 묵묵히 앉아 눈을 감고 있는데, 한 어른의 말이 들려 왔다. “중책을 맡은 사람은 ‘하늘마음’을 가져야 하네.” “예? ‘하늘마음’요?” “하늘처럼 맑고, 밝고, 넓고, 고요한 마음 말일세.” 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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